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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은 좋은 친구사이가 되어야”
이방자여사, 낙선재(樂善齋)의 추억
 
記者 이법철
 
 
대불총(大佛總)의 상임부대표인 이건호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방자(李方子) 비(妃) 전하(1901년 11월 4일 ~ 1989년 4월 30일)가 생전, 수원시에 지적장애인학교인 자혜학교(慈惠學校)를 설립하여 심혈을 기울였는 데, 그 학교 교정에 오는 5월 8일 이방자여사의 동상을 세우는 제막식을 한다며 전주 이가인 나에게도 참석해달라는 초청의 전화였다. 초청 수락의 전화를 끊고 나는 의자에 앉아 이제는 아득한 과거사인 창덕궁(昌德宮) 내에 있는 낙선재(樂善齋)에서 이방자여사를 만나 대화를 나눈 추억과 그분이 만날 때마다 강조한 ‘제행무상(諸行無常)’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적셨다.

이방자(李方子)여사의 호칭은 다양하다. 의민민황태자비(懿愍皇太子妃), 영친왕비(英親王妃), 영왕비(英王妃) 등이다. 이방자(李方子)라는 이름은 일본식 원래 이름인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 方子)에서 성(姓)인 나시모토를 뗀 방자(方子)에서 신랑의 성(姓)인 이(李)를 붙여 이방자(李方子)로 칭하는 것이다.

이방자여사는 일본 매이지(明治) 천황의 조카인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梨本宮守正) 친왕(親王)의 장녀로 태어났고, 유년시절에는 훗날 천황이 되는 당시 히로히토(裕仁) 왕세자의 비(妃)로 간택 되었으나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 등 정치인들이 정략으로 이방자여사를 대한제국 황태자비로 정략결혼을 하게 한 것이다. 오늘날 전주 이씨 인사들 가운데는 이방자여사를 이방자비전하(李方子妃殿下)를 줄여 방자전하(方子殿下)라고도 호칭한다. 나는 이 추억의 이 글에서는 본인이 생전에 나에게 바라는 호칭인 이방자 여사로 적는다.

나는 1978년 10월 1일자로 대한불고 조계종 기관지인 대한불교(훗날 불교신문)의 편집국장으로 임명을 받았다. 다음 해 어느 날, 나는 이방자여사에 대한 이야기로 연재물을 집필해보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이방자여사를 찾아나섰다. 당시 이방자여사는 창덕궁 내에 구석진 낙선재(樂善齋)에 살고 있었다. 낙선재는 헌종(憲宗) 때 직급이 낮은 후궁을 위해 지어준 건물이다. 한국 정부는 대한제국의 영친왕이요, 황태자인 이은(李垠) 가족을 그러한 낙선재에 살게 했는데, 이는 모욕을 준 것이다.

낙선재는 창덕궁에서 외지고 초라한 채색이 전무한 누추한 고택(古宅)이요, 너무 외진 곳이어서 안개나 피우고, 몽환(夢幻)적인 ‘전설의 고향’의 영화를 찍는 데 적당한 건물같았다. 내가 낙선재를 찾았을 때, 비운의 왕비인 이방자 여사는 자신 보다 나이가 적어 보이는 여성과 함께 있었다. 당시 낙선재는 금남(禁男)의 집이었다. 당시 이왕가(李王家)의 대궐은 물론 재산은 모두 국가에서 몰수 당한지 오래이고, 구석진 낙선재의 건물에서 이방자여사는 제행무상을 절감하면서 숨죽이듯 살고 있었다.

낙선재를 찾은 나에게 다른 여성이 다가와 사전에 약속을 했는가? 어느 누구인가? 질문을 냉엄히 내게 던졌지만, 나는 당돌하게도 “친척인데 면회하게 해달라.” 졸랐다. 잠시 후 하얀 한복을 입은 이방자 여사가 나타났다. 나는 서서 합장 하여 인사를 하고나서 친척이라는 말에 대한 해명을 했다. 나도 전주 이씨고, 효녕대군의 후손이고 아버지는 강(康)자 항렬이요, 조부는 기(起)자 항렬이고, 나는 재(宰)자 항렬이라며 신분증까지 내밀며 자기소개를 했다.

젊은 승려가 불쑥 나타나 친척이 면회신청을 한다고 주장하니 이방자 여사는 어리둥절 하다가 나의 설명을 듣고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전주이씨는 모두 일가친척이지요. 친척 스님이 귀한 걸음을 하셨네요.” 반겨주었다. 나는 그 때 차를 대접하는 기품있는 이방자 여사에게서 세월의 노쇠가 아닌 병색(病色)이 완연했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 날 이후로 내가 조계종 총무원을 떠나기 전 수차 만났다. 내가 찾아가기도 하고, 이방자 여사가 총무원이 있는 조계사에 혼자 나를 찾아오기도 했다. 나는 만나 얘기를 나누면서 질문을 했고, 많은 이야기를 듣는 입장이었다.

이방자 여사는 금강경을 좋아하는 것같았다. 금강경에 나오는 인생사가 꿈과 같고(如夢), 헛개비(幻)같고, 물거품(泡)같고, 그림자(影)같다는 말을 많이 했다. 공수래(空手來), 공수거(空手去)를 말했고, 얼마나 그동안의 인생사에 절감했는지, 제행무상을 거듭거듭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은 자의가 아닌 일본 천황과 권세있는 신하들의 정략의 술수에 의해 철저히 결정된 것에 슬퍼하면서 정업(定業)은 피할 수 없듯이 운명에 대해서 피할 수 없는 것 같다고 한탄했다. 그녀는 원래 일본국 천황인 메이지(明治)의 조카요, 친왕(親王)인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梨本宮守正)의 장녀로 태어났고, 처녀 때, 장차 천황이 될 히로히토[裕仁] 왕세자의 비로 간택되었었다.

당시 처녀 마사코는 황족이 다니는 학습원(學習院)에 입학하여 면학에 힘쓰고, 별도로 히로히토 황태자빈이 되는 수업을 받던 중 비운이 찾아왔다.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의 권세가들이 음모하여 황실의 의관(醫官) 쯔기기와(次川)와 짜고 마사코 처녀를 검증한 결과 불임(不姙)의 몸이라는 거짓 보고를 천황에게 올려 히로히토 왕세자빈 후보에서 제외 시킨 것이다. 훗날 의관 쯔기기와는 양심의 가책으로 참회속에 자결했다고 전한다.

당시 이토히로부미는 대한제국을 향해 흉계를 꾸몄다. 고종황제와 엄귀비의 소생인 장차 황태자가 될 서열의 영친왕 이은(李垠:1897년-1970년 5월 1일)을 일본에서 교육을 시킨다는 명분으로 11세 되는 해 강제적으로 일본국에 데려갔다. 속셈은 영친왕의 머리에 철저히 일본의 교육을 통해 태화(太和)혼을 심겠다는 정치공작이었고, 볼모였다. 이토히로부미 등 권세가들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선전하는 데 적임자를 찾았다. 대한제국에게는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德惠翁主)를 일본국에 시집을 보내고, 일본국은 마사코를 영친왕의 비로 보내 내선일체를 선전하겠다는 것이다. 당시 처녀인 마사코에게는 천황의 내선일체를 위해 헌신하라는 비밀 칙령(勅令)에 부당하다고 반대할 수는 없었다.

내선일체를 위해 헌신하라는 천황의 비밀칙령에 황공히 부복(俯伏)하고 절대복종을 의미하는 힘차게 “하이!”를 외치며 양볼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충의(忠義)를 바쳐야 하는 마사코 처녀의 한(恨)을 나는 상상할 수 있다.

천황의 비밀 칙령에 의해 마사코는 히로히토 황태자가 아닌 1916년 일본에 볼모로 잡혀와 일본 육군사관학생이 된 영친왕과 약혼을 하고, 1920년 영친왕비가 되었다. 1921년 아들 진(晉)을 낳았다. 하지만 1922년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진을 잃는 슬픔을 겪었다. 1931년 다시 아들 구(玖)를 얻고 행복한 생활을 하였으나, 1945년 광복으로 연합군에 의해 일본왕족에서 제외되어 거처와 재산을 몰수당하고, 고생 끝에 1963년 의식불명이 된 병석의 영친왕과 함께 귀국할 수 있였다. 그들이 오매불망(寤寐不忘) 원했던 귀국의 소원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의 소신있는 배려로 귀국할 수 있었다. 대궐 등 이왕가(李王家)의 재산은 모두 국가로부터 몰수 당한 후라서 이방자 여사 부부는 어렵살이 낙선재에 기거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일본의 패전과 항복은 이방자 여사의 비운의 운명을 더욱 가혹한 비운의 운명으로 빠져 들게 했다. 대동아공영(大東亞共榮)이라는 미명(美名)의 사상에 고무된 일본의 천황과 총리대신을 위시한 각부 대신들, 부추기는 언론들, 일본 군부는 나가고(進出) 그쳐야(止)를 분간 못하는 전쟁을 계속했고, 일본군은 선전선동의 황군(皇軍)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광신적으로 믿고 미친듯이 질주하듯 하여 미국 하와이 진주만까지 기습 폭격하는 망조(亡兆)의 짓을 해버렸다. 진주만 기습의 총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 五十六)는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하는 것을 두고, “우리는 잠자는 사자를 건드렸다.” 개탄했지만, 미국과 전쟁을 주장하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를 필두로 한 육군 강경파에 맞서 이길 수가 없었다. 일본국의 패전은 이방자 여사의 운명에도 더더욱 내리막 비운의 중첩이었다.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 순종, 그 다음 황제로 계승되는 영친왕이요, 의민황태자인 이은(李垠)은 이왕가(李王家)를 복원하고자 일본국에서 대한민국 정부에 귀국신청을 수차 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측근에서 강력히 귀국을 반대하였고, 이은(李垠)과 이방자 부부가 신청하는 국민증(國民證)도 해주지 않았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이은(李垠)과 부인 이방자 여사는 한국국적과 일본 국적도 없는 무국적자(無國籍者)로 한동안 살아야 하는 딱한 신세로 전락해버렸다. 이은(李垠)은 이때 울화병으로 골수에 사무치는 깊은 병이 들어버렸다고 전한다. 실어증(失語症)까지 왔다.

이방자 여사는 1962년 한국국적 취득 후부터 지적장애인(知的障碍人)들을 대상으로 선행을 시작했다. 그것은 부군인 이은(李垠)의 유언같은 부촉(咐囑)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방자 여사는 1963∼1982년 신체장애자 재활협회 부회장을 지냈으며, 1965년 자행회(慈行會)를, 1966∼1988년 서울칠보연구소를 설립하여 자신이 일본국에서 배운 칠보기술로 장애인을 돕는 자금을 만들었고, 그 기술을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전수해주었다. 중국 청제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가 정원사가 되었듯이, 대한제국의 영친왕비인 이방자 여사는 장애아들을 지원하기 위한 칠보공예사가 되었다.

또 이방자 여사는 1967∼1986년 사회복지법인 명휘원(明暉園) 이사장 및 총재, 1971년 영친왕기념사업회 이사장, 1975년 수원시 자혜학교(慈惠學校) 이사장, 1982년 광명시 명혜학교(明惠學校) 이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영친왕의 유지를 받들어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정박아 교육·지체부자유자들의 생계유지를 위한 기술교육 등 육영사업에 정성을 쏟았다. 그녀는 천황의 칙령에 순종하여 "내 조국도, 내 묻힐 곳도 한국"이라고 말했고, 한국 장애인들의 어머니로 봉사해 온 것이다.

1970년 5월 1일 이은(李垠)은 생을 마감하는 최후까지 부인 이방자 여사에게 한국의 장애 소년, 소녀들을 위해 헌신할 것을 부촉했고, 이방자 여사는 눈물로 맹세했다. 이방자 여사는 재산 전체를 장애인 소년소녀의 교육을 위해 헌납하고, 교육에 헌신하다가 1989년 4월 30일 창덕궁 낙선재에서 직장암으로 고통속에 세상을 떠나갔다. 그 후 사람이 살지 않아 낙선재는 텅 비어 있다. 낮에는 관광객으로 시끄럽지만, 밤에는 전설의 고향에서 볼 수 있는 몽환적(夢幻的) 신비로움만이 있을 뿐이다.

비운의 영친왕비요, 의민태자비인 이방자 여사는 함박눈이 펄펄 내리는 어느 겨울 날, 나에게 친필 휘호인 ‘제행무상’이라는 한문 글자를 써서 주면서 이렇게 부촉했다. “한국과 일본국이 좋은 친구가 되도록 노력해주세요.” 나는 암으로 병색이 깊어진 것을 안타까워 하면서 일본국에 돌아가 치병할 것을 권유했다. 이방자 여사는 쓸쓸히 웃으며, “나는 천황의 칙령을 엄수했고, 남편의 부촉인 장애인 소년, 소녀를 위해 헌신하고 갈 뿐입니다.“ 그녀는 천황에 충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또하나의 사무라이 같았고, 부군을 일편단심으로 모시는 열녀(烈女)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반도는 과거 선린(善隣)아어야 할 중국, 일본국에 너무 많은 침략을 당해 통곡과 눈물이 마를 날이 없을 지경이었다. 중국은 1천년이 넘도록 한반도를 속국으로 고통을 주었다. 양육강식(弱肉强食)이듯 한반도는 중국, 일본국에 고통을 당했고, 현재도 고통이 완전히 종식되지 않았다. 일본국이 한반도에 끼친 패악에 대해서 일일이 거론해서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100년이 가까워오는 불행한 과거지사(過去之事)만 가지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사과와 보상을 요구할 때 양국은 더욱 증오심과 원망심이 깊어질지 모른다. 나는 생각한다. 블행한 과거지사를 韓-日의 반면교사로 삼고 미래를 위해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이 좋지 않은가? 고통과 번영을 함께 하고, 눈물을 서로 닦아주는 좋은 친구 말이다. 이제 인류는 지구촌(地球村) 시대이다.

끝으로, 나는 일본인 가운데 충의와 사랑을 알고 한국에 봉사하고 한국 땅에 묻힌 이방자 여사는 진짜 일본여성의 표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찌 한국에 봉사한 일본인이 이방자 여사 뿐일까? 이제 비운의 영친왕비요, 한국 장애 소년, 소녀의 어머니였던 이방자 여사는 제행무상속에 경기도 남양주시 홍류동의 영친왕 묘소에 합장되었다. 나는 언제인가, 이방자 여사의 묘소에 한일 여행객들이 좋은 친구가 되어 향을 태우고, 헌화하는 때가 올 것을 간절히 희망한다.◇

이법철(大佛總, 상임지도법사)




 
기사입력: 2015/05/04 [07:28]  최종편집: ⓒ 국제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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